<약력> 김태수
1927.12.15. 경북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남
1938. 어려서부터 공사장 막노동을 시작
해방 후 전북 김제군 부량면 노동당 위원장으로 활동
1950.07. 인민군 의용군에 자진입대, 9.28 퇴각 시 북상하지 못하고 입산해 빨치산 활동
1952.02.19. 체포.
1952. 국가보안법, 특별조치법으로 무기형 받고 대구, 대전 등에서 복역
1960.10. 15년으로 감형 받아
1967.08.07. 16년 형을 살고 출소
직후 운전면허를 땄고, 팔순 노모를 모시며 못다 한 효도를 함
원불교 정신장애인 요양시설인 ‘삼정원’에서 봉사활동
1998.05. 형님 김중묵 종사 입적
(형님 양산 김중묵 종사는 원불교 시조인 대조사에게 사사한 교계의 거두,)
조카 3형제가 김태수 선생을 모심.(아버지의 유언대로 숙부를 아버지처럼 대함)
조카들이 집, 차를 사주고 김선생 결혼도 시켜드리는 등 극진히 모심.
어머니와 가족들을 위해 감옥 동지들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냄.
보안감찰의 감시와 편견 속에서 평생을 숨죽여 지내
1971. 결혼, 2남 1녀를 둠
1992. 보안감찰 대상에서 벗어남.
1997. 모친 작고.
2000.09. 비전향 장기수로 송환 대상자였으나 ‘자격도 안 되고 내가 가면 가족에게 폐를 끼친다’며 고사
2001. 평생의 꿈 ‘죽어서라도 북녘에 가고 싶어’ 2차 송환 추진 운동에 참여
2002. 여름. 금강산 관광 다녀옴
2003.03.19. 밝혀지지 않은 약물을 복용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향년 77세)
평소 ‘형님처럼 때를 알고 죽어야 할 텐데’라고 자주 말 함.
‘하룻날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초저녁 잠에 일찍 드는 사람과 같이 내 인생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자연으로 귀화하노니 형제 우애하고 잘들 살아라’고 유서 남김.
감방동기들은 김 선생을 ‘명랑했고 낙천적’이었고 ‘운동시간이면 제일 먼저 달려나와 공을 잡고 껄껄 웃던 분’이라고 회상
통일광장 권낙기 대표는 “결과적으로 ‘타살’이다. 국가보안법과 보안감찰법의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를 마지막까지 옭아매고 있었다”라고 일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