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선생 추도사]
평생 염원 보시지 못한 채 가신 김찬호 선생님
2차 송환대상 장기수 김찬호 선생님이 31일 낮 12시 40분 전북 익산시 미소요양병원에서 향년 87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빈소는 전북 익산시 주현동 174-4 주현교부에 마련되었고, 8월 1일 오후 8시 빈소에서 추도식을 가진 뒤 2일 오전 9시 발인, 유해는 팔봉화장장을 거쳐 부안농장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김찬호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권오헌 명예회장의 조사를 바칩니다.
또 한분의 비전향장기수가 평생 염원이었던 자주통일 세상을 보시지 못한 채, 그리고 신념의 고향을 밟지 못한 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일찍이 민족의식이 투철하셨기에, 해방공간에서부터 전쟁 시기를 통해 자주통일을 위한 치열한 삶을 살아오셨고, 그런 이유로 27년이란 오랜 시간을 0.75평 독방에 갇혀 온갖 박해와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업을 이어갔으면서도 출소 뒤 찾아본 고향에는 가족도 친척도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는 폐허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이곳 완산골 어느 농장에서 치열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행적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셔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30년 10월 23일 서울 종로 숭인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23대가 계속 살아오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혜화동의 경신중학교(현 경신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세상 부러움 없는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1945년 조국 광복과 함께 선생님의 평온했던 삶은 격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일제시기 1920~30년대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셨던 영향을 받아 당시 학생 신분으로 민주청년동맹 등에 가입활동을 하셨고, 이와 관련 지명수배를 당하는 등 피신 생활을 하며 활동을 하셨습니다.
1948년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와 관련, 북으로 가는 인사들의 길 안내를 맡아 하셨습니다. 그러나 1949년 공안당국에 체포, 약관의 나이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인민군의 서울 입성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한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연료사업소에서 일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인민군에 입대하여 대구 인근까지 진격하는 치열했던 전장을 겪으셨고, 1950년 9월 전략적 후퇴 시기에는 강원도 금강산지역 그리고 항해도 81부대에 있다가 개성 부근에서의 길 안내를 맡아 하시는 중대장으로 복무하셨다고 합니다.
1953년 7월 휴전과 함께 평양시 복구사업에 참여하셨고, 1957년 인민군에서 제대하시어 곧바로 공장에 배치되어 이번에는 생산현장에서 일하셨습니다. 이후 함남 장진군 군당 선전부에서 활동 중 중앙당에 소환, 통일사업으로의 공작 임무교육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1961년 4월, 선생님은 강원도 화천지역을 거쳐 남으로 오시던 중,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체포돼 국방경비법 등 위반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체포과정의 석연찮은 일로 선생님께서는 씁쓸한 여운을 남기셨습니다. 당시 북측 공작원 안내원은 남측 국군을 먼저 발견하여 체포했으나 부대로 돌아가게 놓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행적이 드러나 위험 속에 있으면서도 살상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생님은 국군의 대규모 포위 작전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1년 4월 12일부터 1987년 12월 24일까지 27년을 0.75평 독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사형 또는 무기수로 수갑을 차고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되고 모든 좌익수에 대한 잔혹한 고문 등 전향공작에서도 이겨냈지만, 식사시간 수갑을 풀어준다며 순간적으로 지문날인을 날치기 당해 이른바 전향공작을 강제 당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통일 임무를 띤 공작업무를 해보지도 못하고 체포된 데 대한 자책감과 순간적인 실수로 자신의 손 엄지를 빼앗겨 전향자가 된 데 대한 죄책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한 번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했습니다. 실수로 체포되었지만, 접선자가 누구인가를 추궁하는 온갖 고문을 이겨내고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란 신념도 철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출소 뒤 30년은 사실상 은둔의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완산군 이서면 농장에 오셨을 때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선생님의 책임관리로 소나무가 가득한 농원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실수, 고향을 송두리째 잃은 공허감을 이곳 농장에서 자연과 함께 은둔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신념은 고향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 이후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며 2차 송환을 요구하시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꿈에 그리던 조국과 신념의 고향가는 길을 잊지 않으시던 선생님은 그러나 오랜 옥고의 후유증을 그리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선생님!
이제 38선도 휴전선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날아 평생염원을 푸시기 빌겠습니다. 무거웠던 역사의 짐 내려놓으시고 고이 잠드시기 빌겠습니다.
2016년 8월 1일 권오헌 드림
(후원회소식 2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