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참고자료 게시판입니다.

[조사] 정순택-통일 조국의 평생염원 남은 사람에게 맡기시고 이젠 편안히 잠드소서-권오헌 2005.10.2
   정순택

[조사]

통일 조국의 평생염원 남은 사람에게 맡기시고

이젠 편안히 잠드소서

 

선생님 ! 정순택 선생님.

신념의 고향 가는 길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끝내 이렇게 가셔야했습니까.

한순간도 잊지 않으시던 통일조국의 그 영광의 날을 보시지 않고 어찌 눈을 감으셨습니까.

침략자 외세를 미워하고 반드시 내쫓아야 한다며 반미 만리장정을 하시더니 그 승리의 날을 보시지 않은 채 이렇게 가셔야만 했습니까.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이었지요.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대표들은 통일부와 적십자사 등을 방문 면담하면서 '조건 없는 송환'이 정부 당국의 방침임을 확인하고, 선생님께 그 소식을 알려드리려 병실을 찾았었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랜만에 눈을 뜨시고 반기시며 손을 잡아주셨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치 저희들의 반가운 소식을 미리 알기라도 하듯이 뜻밖에도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좋아지셨던 모습과 "동지들 두고 먼저 갑니다." 하시던 말씀이 이렇게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외세와 분단에 맞서 독재와 폭압에 맞서 32년 그 모진 세월 이겨내신 투혼으로 반드시 병마를 이겨내시고 신념의 고향 사무치게 그리운 가족 만나실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 희망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다니,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겨우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반미 시위 전국순례를 하시는 등 언제나 건강하셨습니다. 높은 덕성과 인품, 해박한 지식과 합리적 사고 방식은 곧 바로 일상생활에도 적용되고 있었지요. 80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청순하고 창의적인 열혈 청년 같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의 학문탐구에 대한 열정, 고결하신 성품, 정의감은 선생님의 전 생애를 규정하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1년 충북 진천에서 송강 정철의 13대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진보적 지식인이고 투철한 통일투쟁 전사이셨지만 명문의 집안이셨음을 숨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려서는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셨고 1937년 당시 충북지방의 명문이었던 청주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셨으며 학교생활 중에 일본어 강요에 항의, 백지동맹을 주도하는 등 이미 항일정신이 몸에 배게 되셨습니다. 1942년엔 지금의 서울 상대인 경성상업전문학교에 입학하셨고, 졸업을 앞두고 일제의 강제학병에 끌려 가는 수모와 분노를 갖게 했습니다. 1945. 8. 15 조국 광복과 함께 귀국하시어 서울상업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셨고 신한공사, 재무부에 입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공주금학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최복섭님과 결혼하셨고 서울대 상과대학 2학년에 편입, 향학열을 불태우시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 선생님은 자주독립국가건설이란 민족적 과제를 가로막고 분단의 원흉이 되고 있는 미국, 특히 미 점령정책에 항거하게 되었고 남조선 노동당에 입당하시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미군정의 낙하산 인사에 불만, 상공부 감사관리 감사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한편, 자주통일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셨으며 19495월 가족 모두와 함께 북녘 조국으로 가셨습니다.

북녘에선 상업성 영업관리처, 재정경제처 등에서 고위직으로 일하셨고 6.25전쟁 시기엔 서울시 인민위원회에서 특수 수매사업을 관장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뒤 상업성 외국인 접대관리처 부처장, 내각경제계산 자격 심사위원회 책임심사원, 내각 기숙자격 심사위원회 책임심사원 등 중책을 맡아하시다가 1958. 7월 분단된 조국을 우리민족의 힘으로 하나되게 하려는 일념으로 남으로 내려오셨으나 바로 체포되어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2년의 모진 옥고를 겪으시게 되었습니다. 사상전향공작의 잔혹한 고문도 이어졌습니다. 곡괭이자루, 가죽 혁대로 때리고 밧줄로 손발을 동그랗게 묶어놓고 몽둥이로 구타하고 물고문하는, 선생님 말씀대로 '인간 이하의 매질과 고독한 독방과 모욕적인 대우로' 선생님은 환각, 환청 등 병마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강제전향 당하고 1989. 12. 23315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32년의 감옥생활을 지옥길이라 하셨습니다. 외세 간섭없는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학문할 때의 동기동창이었고 일제의 강제 학병에 함께 끌려갔던 남쪽의 옛 지우를 만나려 한 것이 왜 간첩이 되느냐고 항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출소하시고도 돌아가실 때까지 보안관찰법에 묶여 감시통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보안관찰자의 꿈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옥을 나오기는 했지만 지옥에서와 같이 아무것도 없다. 생물학적 삶을 이어갈 능력도 처자도 집도 돈도 없다. 일자리를 줄 사람도 그리고 보안관찰 처분된 사람으로 자유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다. 외세를 미워하는 미움이 있다. 통일을 갈망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고 거짓말하는 통치자를 노래기 같이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 우정을 꽃보다도 더 곱게 여기는 마음이 있고 재물에 탐욕스런 사람을 똥보다 더 더럽게 보는 마음이 있다. 부정과 비리를 보면 폭발하는 분노가 있고 위선자를 송충이처럼 징그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선생님의 진면목이기도 했지요.

 

선생님. 20009. 2일 그 날은 비전향장기수 63명이 북녘 신념의 고향으로 돌아갔던 감격적인 날이었었지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정순덕 선생님과 함께 제외되셨습니다. 저들이 강제전향 시켜놓고 '전향'을 했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1999. 4. 24일 등 두 번에 걸쳐 한겨레 신문에 전향취소광고를 내셨었지요. 선생님께서 그때 실망하시던 모습은 참으로 뵙기 민망하고 죄송스럽기만 했습니다.

9. 2 1차 송환이 이루어지고 선생님께서는 낙성대 '만남의 집'에 오시게 되었었지요. 음성 생질님댁에 계실 때나 성수동, 연희동에 계실 때만해도 필담을 할 정도로 귀가 어둡지 않으셨지만 '만남의 집'에 오셨을 땐 매우 심한 상태였었지요. 이 또한 오랜 옥고의 후유증이었고 통일투쟁 실천과정의 상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귀가 어두워 동지들과 함께하는 모임에 자주 함께 하지 못하는 대신 또 다른 민족적 과제에 헌신하셨습니다. 바로 조국통일과 반미반전을 위한 국토대장정이었습니다.

'미군은 물러가라', '반미는 민족양심 ', '미군가라', '소파 고쳐라', '전쟁반대', '평화협정체결', '파병반대', '파병은 침략', '국가보안법 철폐'. 이러한 구호들은 선생님께서 반미시위 등 전국토순례를 하시면서 어깨띠에 써넣은 글들이었습니다. 20017. 27일 동해안 고성에서 서해안 강화에 이르는 '통일염원 국토횡단 대행진'을 시작으로 200111월부터 20044월까지 6차에 걸쳐 50,445km 기차 시위를 하셨고 2004년 말까지는 선박으로 10,533km를 시위순례하셨습니다. 울릉도, 흑산도, 제주도, 백령도, 남해도, 거문도, 암태도 등 그 섬 마다의 역사성을 강조하시면서 해상 시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20057월까지 또다시 11,000km를 시위 순례하시는 투혼과 열정을 보이셨습니다.

 

정순택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셨습니다.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투혼과 열정으로 시대의 과제에 헌신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병원을 찾으셨습니다. 처음엔 가벼운 탈장수술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지난 95일 간암이란 청천병력같은 병원측의 단층촬영 판독결과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간 뿐이 아니라 췌장에서 시작되어 횡경막으로 간으로 온통 암세포가 덮여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선생님껜 차마 바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신념의 고향 가는 길, 가족 상봉의 날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920일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없다. 다만 신병정리가 필요하다. 반미시위를 원래 목표대로 못하고 떠나게 되어 아쉽다. 원래 목표는 6.15까지 70,000km, 8.15까지 80,000km, 9.9까지 90,000km, 10.10까지 100,000km 하려 했다. 도중에 그만두게 되어 아쉽다.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가는게 애석하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부끄럽지않게 살고 갔다는 자긍심을 갖는다. 좀 더 통일을 촉진시키지 못해 부끄럽다.

우리 민족과 내 아들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민족의 최후의 적은 미국이고 미국에 대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대항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존립할 수 없다. 신심을 다하여 저항해야한다. 다행히 6자 회담이 합의되어 경하할 일이다. 우리민족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신명을 다하여 미국에 맞서야 한다. 숭미, 공미 하면 주체의식을 잡아먹는 병균이 될 것이다. 미국의 세계화 정책은 미국놈들이 아메리카 버지니아주에 상륙하면서부터 이제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다. 미국의 세계전략, 강도적인 것에 결코 굴복해선 안된다. 대항하고 이겨야한다.‘

 

선생님.

민족적 양심으로 '일그러진 민족사'를 살았던 지식인들에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 있었다면 선생님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일제 강도에 맞서 민족해방전선에 서는 일이었고 외세와 분단에 맞서 자주와 통일투쟁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겨레가 노예가 된 상태에서 계급계층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가 갈릴 수 없었던 이유도 되겠습니다.

선생님 이제 80평생을 선생님의 정의와 양심에 따라 치열하게 살아오셨던 그 고된 일들은 남은 저희들이 다 하겠습니다. 비록 몸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선생님의 고귀하신 조국사랑, 인간사랑 정신은 모든 이들의 가슴마다에 남아 선생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이 잠드소서.

 

 

2005,10.2

통일애국열사 정순택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 권오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