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자서전: <바람에 꽃잎은 져도>의 저자 박정덕 님(3부)
한국전쟁의 슬픈 사랑(3) - 빨치산 박정덕 할머니
태생적으로 좌익이고 우익이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저자는 남편과 결혼이 성사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좌익이라는 멍에가 씌워져서 너무도 모진 고문과 혹독한 문초를 당하게 되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남편과 같이 운명공동체가 되어 빨치산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너무 고생스러우니 오지 말라고 했지만 저자는 남으나 들어가나 고생스럽기는 매한가지요 오히려 남편과 같이 있는 편이 낫겠다 싶어 따라 나선 것이다. 하지만 산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자식들이 모두 생죽임을 당하자 피신 생활 속에서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우리 남편은 나를 못 오게 하였지만, 나는 모두 잊고 같이 살든지 죽든지 함께 있어야 한다면서, 입산을 하면 남편과 같이 있게 되는 줄 알고 따라 갔다. 그러나 빨치산 생활이란 것이 녹녹치 않았다. 날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남편과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더 많았다. 입산생활하면서 민폐도 많이 끼쳤다. 입산 당시에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산생활이 오래 되다 보니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남편만 믿고 있었고 그저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이 좋기만 했다. 입산 초에 소개받은 부락에서 거의 합숙생활이나 다름없이 생활하였는데 빨치산들은 시간이 흐르자 점점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 힘든 생활 속에서도 남편과 같이 있으니 때로는 신혼생활로 착각이 될 때도 있었다. 그때 내 나이 21세, 너무 철부지였다.(바람에 꽃잎은 져도, 박정덕 저, 희망사업단(2011), 37쪽)
저자는 저절로 당원이 되어 도당학교에 입학하여 남편과 다시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어진 교육을 수료한 뒤에 곡성군 오곡면 여맹위원장으로 발령을 받아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 초기에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절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후에 남편과 재회하여 사랑을 나눈 뒤 임신이 되었으나 너무도 열악한 환경속에서 산고 끝에 결국 사산하고 말았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 주력부대는 이북으로 쫓겨 가고 남쪽에 남아있던 빨치산 부대는 지리산 지역에 남아 후방투쟁을 지속하게 된다. 그때부터 지옥과 같은 토벌 작전이 개시되고 많은 동료들이 전사한다. 남편과는 다시 헤어졌다가 짧게 조우하지만 그때가 마지막 이었다. 남편과 이별한 뒤에 곡성군 지역에서 보급투쟁을 하다 토벌대에게 쫓기다 부상을 당하게 된다.
모두 집합장소에 잘 왔는데 그 밤에 우리들의 움직임이 꼬리가 잡혔다. 다음날 승주, 구례, 곡성 3군 합동작전으로 새벽부터 추격이 시작되었다. 아지트에서 나와서 모두 능선을 향하여 올라가니 국군들이 우리를 향하여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우리는 전부 옆으로 돌아갔다. 빗발치는 총알 때문에 능선으로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옆으로 이동하자 선발대가 그곳도 길이 막히어 최후 방법으로 모두 아래쪽으로 몸을 굴렸다. 아래쪽은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나
도 따라 굴렀는데 나는 장소를 잘 못 선택해서, 겨울에 물이 바위를 타고 내려오다 얼고, 또 그 위에 물이 흐르다 얼어붙은 빙판위로 구르게 되었다.
한참을 굴러 내려오는데 발목을 무엇이 탁 때리는 것 같았다. 굴러 내려와서 일어서려고 하니 발목이 부러져 대롱대롱 거렸다. 부러진 다리 걱정보다,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다. 위에서 집중사격을 했지만 그곳까지는 총알이 미치지 못했다. 죽음을 각오한 우리 빨치산이나 굴러 내려오지 아무나 못 할 일 이었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아마도 100m도 더 되는 높은 절벽이었다. 나는 밑으로 내려간 동지들이 올라오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어둠속에 인기척이 있어 내려다보니 의무관이 먼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가웠다. 의무관이 내 다리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살피더니 주변에서 나무토막을 주워서 내 다리에 대고 붕대로 꼭꼭 묶고 그 귀한 페니실린도 주사해 주는 사이 동료들이 많이 올라왔는데 위원장도 따라 왔다. 모두들 걱정하면서 나를 여러 동료들이 부축하여 비상 장소까지 이동했다.
그곳에서 빨리 식사를 해결하고 모두 떠나는데 나는 낙오될 수밖에 없었다. 위원장이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적당한 장소가 있다면서 나를 그 곳에 비밀스럽게 숨겨두고 밥 두끼, 도시락, 그 귀한 쌀과 소금을 두고 모두 떠나는데, 그때 그 대열 속에 남편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가 남편과 마지막이었다. 그날 내 기억에 1952년 2월 9일로 기억된다. 2월 초순이라 산은 많이 추웠다. 훗날 생존한 동료에게 들은 남편의 소식은 이동 중에도 간간히 눈물을 흘리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아마도 낙오된 나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산에 두고 떠나야만 했을 남편도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때 상황으로는 나는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은 말골에서 잠복한 국군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여자로서 평탄한 삶을 살 수 없게 했던 남편이지만, 첫 정이었기에 그의 죽음이 애달프고 서럽기만 하다. (바람에 꽃잎은 져도, 박정덕 저, 희망사업단(2011), 46,47쪽)
이후에 저자는 홀로 남겨져 있다가 마을로 가서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문순경이라는 좋은 분을 만나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배려를 받을 수 있었고 동네 주민들은 비난보다는 동정어린 눈길로 저자를 바라봐 주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음을... 부러진 발목은 썩어서 결국 절단하게 되었다. 남편도 잃고 다리도 잃어버린 저자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결국 하지 못하고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광주 형무소로 옮겨졌다.
52년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7년간 복역하다 59년에 출소하여 직업 교도원에서 사회 적응훈련을 하였다. 복역 중에 옥에서 만난 동료들과 수녀님, 목사님 등의 도움으로 저자는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되었다. 이후 사회에 나와서 재혼도 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2011년 관악구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자서전 사업에 조용히 신청하여 지난날의 아픔을 글로 적어내린 것을 필자에게 전달해 주셨다. 내용이 너무도 드라마 같아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작지만 단아한 박정덕 할머님의 삶이 커다란 산과 같이 느껴졌다. 저자는 지금도 관악구에 살면서 남은 여생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통일의 그날을 기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시 한편을 소개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기다림
나 여기 기다리고 있었네.
긴긴 엄동 기다렸다
터져 나온 목련, 개나리
변함없이 복지과 동산에
그 자리에 다투어 웃고 나온
진달래 누군가 기다리 듯
북풍한설 견디어 하품과
기지개로 소리 없이 떠밀고
제철 따라 피어나는 삼라만상
달력도 시계도 없는데
손짓 하는 것도 아닌데
어이 그리 정확하나
네 마음 황혼에 묻치고
너와 나 평화통일
꿈꾸며 새 아침을 기다리자.
희망사업단 대표 유명종.
* 자서전 제작 문의 : famousserv@naver.com, 010-9204-7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