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송환 희망자 정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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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덕

[인터뷰] 정순덕-<아름다운 청년> 27호 (2001.9)
   정순덕

사진 아래 인터뷰 전문 






[연두빛바다빛] 청년을 연두빛이라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을 바다빛이라 부르겠습니다. 청년광장에서는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 청년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찾아 각 지역을 다닐 것입니다.

 정순덕 할머니

 임소희 기자

 

취재약속을 잡은 812일은 정순덕 선생님의 68회 생신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원래는 815(음력)에 치룰 잔치이지만 그날은 생신 챙기기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이날 모이기로 했다고. 마침 부평역 광장에서는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2001 인천시민 통일대축전' 행사가 한창이었다. 길거리 농구대회, 퀵보드 이어달리기, 615개 풍선으로 미군 9명에게 물 먹이기 등 통일의 의미를 담은 행사가 부평역 곳곳

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행사를 진행하던 곳곳에서 소리 없이 몇 사람이 빠져오더니 삼삼오오 근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순덕 선생님은 이미 자리에 앉아 계시고 후원회원들로 보이는 몇몇이 식당 한 구석에서 앨범을 정리하고 있었다. 흘깃 보니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며 자신들의 사진,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이 앨범 하나를 다 채우고 있다. 정순덕 후원회의 역사는 그 앨범의 두께만큼이나 만만치가 않다.

 

<사진> 후원회와 같이 한 정순덕 선생님 생일잔치. 생일 초를 막 불어 끈 정순덕 선생님

 

정순덕 선생님 후원회를 얘기하려면 선생님이 인천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기수 선생님 외에는 남측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지내시던 정순덕 선생님이 과로로 쓰러진 19993. 뇌출혈로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선생님이 인천지역에서 투병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곳은 인천연합 여성위원회였다. 돌아가면서 간병을 하기로 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지만 단순한 간병 차원에서 선생님을 모실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깊어졌고 보통 사람보다 다리 하나 정도는 가벼울 정순덕 선생님의 존재는 천근의 무게를 실은 질문을 던져왔다, '누구를, , 어디까지를 책임지려는가' 하고. 선생님의 생활 전반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이 살아온 가볍지 않은 역사를 알리고, 오늘에 이어 나가야하는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진> 간병과 소식지발간 소모임 회원들(뒷줄 좌로부터 이소헌, 성양현 씨. 가운뎃줄 좌로부터 양회정, 이광호, 김미자 씨, 맨 앞 이병우 씨)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선생님이 송환되실 수도 있고 안 되실 수도 있다. 정순덕 선생님을 끝까지 책임질 마음이 있다면 해보자."

이광호(. 28. 공익근무요원) 씨가 전하는 정형석(. 43. 인천나사렛한방병원 원

) 후원회 운영위원장의 당시 말이다. 정형석 씨가 자문위원으로 있고 이광호 씨, 이소헌(. 29. 민주주의민족통일인천연합 인권국장) , 김미자(. 29. 초등학교 교사) 씨 등이 활동하던 인권마당(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권에 심각한 침해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한 인천지역 인권단체)'끝까지' 선생님을 책임질 각오를 하면서 정순덕 후원회의 진짜 출발이 시작되었다. 후원회를 인천지역으로 확대하고, 돌아가면서 선생님을 간병할 수 있도록 당번을 정하고. 그 의지와 결실이 한 두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은 '2000년 인천연합 송년의 밤'이었다. 한 해 동안 걸어온 지역 운동의 결실을 모아내고 내년을 바라보는 그 자리의 제목이 '정순덕 선생님 후원을 위한 인천연합 송년의 밤'이었던 것이다.

준비위원회 시기를 거쳐 현재의 정순덕 선생님 후원회가 출범한 것이 올 612일이다. 지금의 후원회는 정형석, 오영호(천주교인천교구통진성당 신부) 공동대표와 13개 단체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 그 외 개인후원회원을 포괄한 방대한 조직이다. 그 속에서 이소헌, 김미자 씨를 주축으로 한 간병과 녹취모임, 이광호씨, 이병우(. 27. 학생) , 양희정(. 26. 방송국 구성작가) , 성양현(. 24. 공익근무요원) 씨를 주축으로 한 소식지발간 모임이 후원회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진> 정순덕 선생님 후원의 밤 행사에 참석하신 선생님.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할머니, 살 좀 빼. 이 배 좀 봐."

자기 할머니한테도 평생 이런 말을 못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순덕 후원회 사람들은 정순덕 선생님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하며 어리광을 부린다. 선생님도 이 정도 타박에는 "~, 많이 빠졌잖아." 하고 능숙하게 대응하신다.

"한동안 선생님이 제 이름을 모르셨어요. 그것도 간병을 4번째 갈 때였는데도요. 처음엔 서운했지요. 그러다가 생각했어요. 내 이름을 외워달라고 하는 것이 선생님께는 강요와 부담이 되겠구나, 그래서 선생님에게 '전 이쁜이에요' 그랬죠." 정순덕 선생님에게 '이쁜이'라고 불리는 김미자 씨. 주위의 야유와 구토(!)에도 아랑곳 않고 "이쁜이 왔어요" 하며 선생님을 모셨던 김미자 씨는 '선생님''할머니'로 모시게 된 발단의 제공자다.

"후원회 사람들이 정순덕 선생님을 '할머니'로 모시게 된 데는 미자 누나의 공이 커요. 미자 누나가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친할머니처럼 선생님을 모시는 것을 보고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서 말하듯 선생님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남다르다. 화장실에 들어가신 선생님이 다시 휠체어를 타기 위해 손을 내밀 때 내가 서툴게 선생님을 안으려 하자 선생님이 대뜸 "넌 못해. 미자만 할 수 있어." 그녀에 대한 선생님의 진한 믿음을 눈빛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번쩍번쩍 선생

님을 들어서 휠체어로, 또 침대로, 변기로, 의자로 안아내는 김미자 씨는 깡마른 체구였지만 정순덕 선생님에 한해서는 괴력의 소유자가 된다.

 

김미자 씨에게는 요즘 행복한 뉴스가 있다. 애인과 결혼을 약속한 것이다. 이 경사를

가져온 것도 알고 보면 정순덕 선생님의 덕이란다. 그녀의 애인(29, 이재식)은 흔히 말하는 '운동권'이 아니다. 직장에서 알게 되어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의 삶이 너무 다르다 보니 확신이 쉽게 서질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재식 씨를 데려간 곳이 선생님이 계신 병원이었다. '내가 모시는 할머니'란 짧은 설명으로 데려간 병원에서 묵묵히 함께 간병을 돕던 그에게서 '이런 사람이면 내 애인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애인의 근무지가 제주도로 발령이 나서 쉽게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이제는 애인이 먼저 정순덕 선생님의 걱정을 하고 안부를 물어온다고.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교육운동에 큰 의지를 가지고 있는 김미자 씨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휴가기간 짬을 내어 그녀가 참가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연수도 함께 갔다왔단다. 상대방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함께 하려는 애인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워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 김미자 씨의 행복한 말이었다.

"'나 올라가기 전에(송환하기 전에) 결혼하라'고 그러세요. 주위에서도 '너희들 주례는

정순덕 선생님이 봐야된다.' 그러시구요." 친손녀와 친할머니 사이라도 이렇게 애틋할까. 사실은 이런 애틋한 사연을 미자씨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후원회 운영위원장인 정형석 씨는 선생님의 치료를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전액 부담하여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후원회 전반 운영을 총괄하지만 고집스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후원에만 묵묵하다.(사실은 인터뷰도 끝까지 거절했다.) 뿐만이랴. 운동을 포기했던 이,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던 이들이 후원회를 통해 선생님의 주변으로 모여 운동하는 삶에 대한 확신을 느끼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다.

 

솔직히 고백하자. 정순덕 선생님과 그 후원회원들을 지켜보며 질투를 느꼈다고. '친할

작성 : repatriation / 2025-09-04 16:3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