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송환 희망자 오기태(장재필)

2차 송환 희망자 개별적인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는 상세페이지입니다.
오기태(장재필)

오기태 선생 추도사_김혜순
   오기태(장재필)

한겨레_가신이의 발자취

오기태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죽어서 고향에 뼈라도 묻히게 살아생전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평생염원을 보지 못하고 선생님께서 저희 곁을 떠난 지 한 달이 돼 갑니다. 이제는 꿈속에서라도 보고싶어했던 김외숙 사모님과 환갑을 넘겼을 네 명의 자식들을 만나보셨는지요! 못다한 말씀, 회한 다 풀고 좀 편안해지셨는지요?

선생님 말씀처럼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닌데통일일꾼으로 남파돼 두 달여 만에 붙잡혀 21년 옥살이를 했으면 형을 살 만큼 살았습니다. 전주교도소 간수들이 한겨울에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12명을 집어넣고 찬물세례를 퍼붓고 허벅지를 전선줄로 감아 고문과 폭력을 휘두른 전향공작은 그 자체로 불법이니 20009월 비전향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전향했다고 길을 막은 것도 부당한 일! 폭력과 고문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며 곧바로 전향무효선언을 하고 2차송환을 신청한 건 당연한 수순이셨습니다.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해 아무런 연고도 없이 교도소에서 배운 목수기술 하나로 전주 남문화방에서 일할 때도 주변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들어왔냐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고 상점과 창고 열쇠를 도맡아서 관리했다지요.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쉼터 나눔의 집에 들어간 뒤로도 영세민들과 노숙자를 위해서 밥 짓는 일을 하고 상담 일을 맡으셨습니다. 어디에 계시던 예의 그 성실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복시키곤 하셨지요. 그렇게 전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매불망 가족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뒷산을 오르며 긴긴 세월을 견뎌오셨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급성폐렴으로 두 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고 2008년에는 또 대장암을 앓는 등 여러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서 자식이라도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중국행을 감행하셨다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단둥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가족들이 있는 온성군!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해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건널 수 있지만, 전주에 남은 장기수 선생들 다칠까 봐, 송환을 희망하는 선생들 모두 함께 당당하게 가겠노라 다시 귀국길에 오르셨다지요.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의연하게 가시겠다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오셨다 하셨어요.

생의 마지막날까지 대통령께 가족 품으로 보내달라 청원을 하시면서 송환의 꿈을 끝내 놓지 못했지요. 평상시처럼 주말 성공회 성당에 다녀온 저녁 갓 퇴근한 조상이 선생에게 고생했다고 말씀하시고는 가래가 끓는다며 잠자리에 들어 새벽녘 책상에 앉아 탄원서의 끝을 맺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90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상이 선생 밥 먹여 출근시켜야 한다며 압력밥솥에 예약취사를 해둔 상태였고 새벽 4시 주인을 잃은 시계는 알람 소리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단 하루도 앓아눕지 않고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홀연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평화동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양심수들을 마중하는 선생님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선생님께서 쓰시던 펜이며 손목시계, 열쇠고리, 사진이 사무실에 왔어요. 사진 속에서는 이렇게 환히 웃고 계시는데 선생님은 우리 곁에 없네요. 선생님, 그립고 많이 보고싶어요.

가지처럼 마른 앙상한 몸으로 기꺼이 고난의 운명을 선택하여 깃발처럼 나부끼며 살다간 오기태 선생님, 이제는 생사의 갈림길도 없고 외세와 분단의 아픔도 없고 고문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선생님의 못다한 꿈, 2차송환을 희망하는 선생님들 살아생전 자식들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 저희가 더 노력할게요. 민족의 존엄과 통일을 위해 온생을 바치신 선생님의 뜻 우리가 이어가겠습니다. 선생님, 통일된 조국에서 꼬옥 다시 만나요.

 

김혜순 /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회장

작성 : hhgl2 / 2025-07-04 21:42:20 , 수정 : repatriation / 2025-07-23 20:2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