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그리운 가족과 신념의 고향땅 끝내 못 보고 가신 박재원 선생님
권오헌 명예회장
새 정부 들어서고 신념의 고향길이 열리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으로 오히려 남북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이를 안타까워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바로 두고 온 그리운 가족과 신념의 고향길을 찾으려던 2차 송환 비전향장기수들이었습니다.
지난 8월 대구에 사시던 이준원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난 뒤 대구 경북지역에 유일하게 남아계셨던 박재원 선생님께서 평생 염원 보지 못한 채 지난 9월 1일 눈을 감으셨습니다.
박재원 선생님은 1930년 1월 20일 경북 영천 괴연동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영천 남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서울로 올라와 낮에 회사를 다니며 덕수상고 야간부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1950년 전쟁 시기 친구의 고향 개성으로 갔다가 인민군의 일시적 후퇴 때 함께 평양 강계를 거쳐 중국 심양에 도착, 인민군기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1952년 인민군 기계화부대에 편입 뒤 귀국하여 금강산 방어전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인민군에서 제대하여 송림에 있는 황해제철소에 배속되어 근무하였고 1958년 김명숙님과 결혼하여 경자·경애·경여 세 자매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이뤄 행복한 시절을 지내셨습니다.
이후 황해북도 도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1964년에는 중당당에 소환되어 활동하였습니다. 1969년 5월 조국통일 임무를 안고 남쪽으로 오셨다가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1심 사형, 2·3심 무기형을 확정받고 대구-대전-대구 형무소로 옮기며 험한 옥고를 겪으셨습니다. 0.75평 독방에 갇혀 일체의 독서가 금지되었고 2년 동안 다리와 발에 족쇄, 손과 팔에 수정을 채우는 야만적 행패를 당했습니다. 또한 악명 높은 전향공작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전향서에 강제 무인하는 반인권 범행도 자행되었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병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1989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20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창살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보안관찰법에 걸려 형사들이 언제나 미행·감시했고 그래서 수없이 일터를 옮기셔야 했습니다. 형제·조카님들도 계셨지만 월북자 가족, 빨갱이 가족으로 시달려야 했고 조카님 한 분은 끝내 경찰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모진 분단시대를 살아오셨습니다. 분명히 북녘에 살아있을 부인과 따님들을 보지 못하고 통일된 조국, 그 평생 염원을 보지 못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대·경 진보연대의 고문으로 계시면서 양심수 석방 운동과 자주통일 운동을 하셨고 서울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각종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빈소는 대구 수정요양병원 장례식장 201호에 모셨고, 9월 2일 오후 대·경 지역 통일원로와 사회단체, 회원들 30여 명이 함께 한 가운데 대구경북 양심수후원회 주관으로 ‘민족통일열사 박재원 선생 추도식’을 가졌습니다. 원영민 사무국장 사회로 대표 헌작,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등 추도의례에 이어 한기명 대경양심수후원회 회장,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추도사와 고경하 문예활동가의 추모의 노래 그리고 참가자들의 헌화로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 9월 3일 발인, 화장을하여 대구시립공원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소식지 3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