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송환 희망자 이준원

2차 송환 희망자 개별적인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는 상세페이지입니다.
이준원

[소식지] 이준원-추도사(권오헌), 추도시(양희철)=310호
   이준원

[소식지 310호] 2017.8.24.


통일애국의 성실한 실천자이셨던 이준원 선생님


권오헌_명예회장


조선인민군 출신, 비전향장기수 이준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원한의 철조망을 헐어내고 막혔던 민족의 혈맥을 이으려다 숱한 고난을 겪으셔야했던 선생님께서 끝내 평생 염원을 보시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시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조국과 가족들, 신념의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셨던 그리하여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운동에 앞장서 계셨고 대구, 경북지역에 사시던 동지들을 2차 송환 희망자 명단에 올리게 하셨던 선생님이 오히려 먼저 저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35년 1월 16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운봉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일제의 억압과 착취, 식민지 지배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야학과 항일운동을 하셨던 어머님의 남다른 지도를 받으셨고, 그 어머님은 해방공간에서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여 리 인민위원장 후보에 오를 정도였다고 하셨습니다. 


1953년 1월 선생님께서는 조선인민군에 입대 14사단 수도방위사단 등에서 복무하셨고 중대 초급 민청위원장을 계속 맡은 매우 성실한 조직원이셨습니다. 


1959년, 상급두대로의 소환과 교육, 1960년 전역 이후 민족보위성 특수정찰국 소속으로 활동하셨고 같은 해 고향에서 강금녀 여성과 결혼 따님을 얻었으나 홍역으로 잃었다고 하셨습니다.


1963년 5월 개성-서울 ‘밀로’ 개척사업 중 남측 첩보원에 체포(9월 30일), 1963년 반공법 15조 등을 적용, 1심 무기, 2심 15년, 대법원에서 15년을 확정판결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대전, 대구형무소 등으로 이감되었고 197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소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감옥에서 익힌 목공기술을 살려 갱생보호소 등에 계시면서도 열심히 일을 하시어 79년 6월 도봉순 님과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정과 생활전선에 충실하시면서도 양심수문제, 자주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시어 대구·경북 양심수후원회, 6.15남측위 대구·경북본부 고문, 대구·경북진보연대 고문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마침내 선생님께서는 오랜 옥고의 후유증과 노환을 이기지 못하시고 2017년 8월 7일 14시 30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진정 명복을 빕니다.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가 주관하고 대구·경북지역 민족민주운동단체가 함께하여 2017년 8월 8일 대구 드림병원 장례예식장에서 ‘민족통일열사 이준원 선생 추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오규섭 이웃교회 목사님 사회로 김병길 통일원로의 약력 소개, 한기명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회장,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권택흥 민주노총 대구·경북본부 본부장 등의 추도사. 김대용 전 민주노총 대구본부 통일위원장의 추모시 낭송, 이정찬 민족문제연구소 대구 지부 사무국장의 추모의 노래, 고인의 사모님 오봉순 여사의 유족인사와 참가자들의 헌화로 모두 마쳤습니다. 서울에서도 통일광장 권낙기 대표,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 노수희 부의장, 박희성 고문이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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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시] 

부음을 듣고…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왔으니 가야한다지만 

갑작스럽게 전해 온 부음 

고향을, 어머니 당을, 조국을, 

생전에 보고 안기고 쌓이길 바랬는데 

좀 참고 기다리지 어인 병고 

함경도 함흥에서 장진호 부전호 쪽 

오로리 동네 가을 추수 후 분배 

그렇게 풍요로웠다던 배부른 나날 이였다던. 

형무소 밑치기 당한 4등식 앞에 놓고 

먹기 아까워라 1/4 털어내어 

허우대 크신 동지 얼마나 배고프시오 

하며 얹어 주시던 이준원 동지 

이젠 고향의 풍요로움 한껏 누리시라 

남도의 인정 받아 안은 은혜 

고마워 하시던 동지시여 

망나니 미국놈 안보니 좋으시겠소 

푸르름에 쌓여 편히 가시기요

작성 : repatriation / 2025-09-07 17: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