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1 | 정관호, 박종린 두 어른을 찾아뵙다
김혜순_회장
▲박종린 선생님 댁을 찾아간 양원진, 강 담선생님과 양심수후원회 김혜순회장과 류경완 운영위원
지난 4월 28일 후원회 월례강좌를 마치고 강담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인천에 계시는 박종린 선생님을 빨리 찾아뵈어야 한다고.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박 선생님은 대장암 투병중이신데 건강이 악화되었다하여 마음도 조급해지고 회장으로서 어른들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걸려 5월 4일 류경완 운영위원과 강담, 양원진 선생님을 모시고 다녀오게 되었다. 내친김에 금천구 시흥에 사시는 정관호 선생님도 뵈었다. 명절 때마다 인사를 가면서 함께 가기를 원하셨던 권오헌 선생님의 청도 있었기 때문이다.
94세인 정관호 선생님은 파킨슨병으로 바깥출입을 못하셔서 요양보호사가 매일 1시쯤 방문해 가사일을 돕는데 그날은 2시에 오라고 손을 써놓고 현관문을 반쯤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난청이라 듣는게 어려우셔서 문자로 연락을 드렸더니 이렇듯 빈틈없이 손님을 맞아주셨다. 당신이 쓰신 시집 두 권과 소설집에 미리 사인을 해 네 명 몫을 챙겨놓으셨다. 동향 출신인 담 선생님이 가서 소식을 전할 테니 가족관계를 적어달라 하니까 수첩에 당신 동생들의 이름과 북청 남산의 모양을 그리시고 택호를 남문안집이라고 써주었다. 강담 선생님의 고향사람들을 말이 많다며 ‘홍원 촉새’라고 우스갯소리도 하였다.
북청 출생으로 1950년 7월 동원(6.25전쟁)되어 남으로 왔다가 9월말 인민군의 전면 후퇴 때 장흥군 유치산에 입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54년 백운산에서 검거되어 국방경비법(이적죄) 위반으로 7년을 복역한 선생님. 제네바협정에 의해 당연히 송환되었어야 했지만 이제는 몸도 병들고 여기서의 인연들도 소중하다며 남북왕래가 자유로워져 가족을 만나면야 모를까 북에 가서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아 하셨다. 하지만 삶이 고단할 때마다 불렀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시집 <아구사리 연가>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노야/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부르셨다/
어려서부터 나이든 뒤까지/
분부하실 때나 꾸중하실 때나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뵙던 그날도 그렇게 부르시며/
이렇게저렇게하 거라 당부하셨다/
다 자란 자식을 객지로 떠나보내면서/
조용조용 타이르는 음성으로//
아무 일 없을 때는 잦아 있다 가도/
몸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는/
그리움으로 맞닿은 그 부름/
베갯머리나 등 뒤에서 한량없는 무게로/
가노야//
이제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 없는/
이 막막한 하늘 아래/
내 삶의 막바지 마루에서/
새삼 그 음성이 메아리져들린다/
커다란 진동으로 또렷이 들린다//
그 부름에 더는 대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다가가는 마음의 재촉/
더는 살아계실 수 없는 연세임을 알면서/
엎드려 절을 올리는 저문 한가위//
가노야/
그 음성 지척에서 들리건만/
지리산 꼭대기에 올라가 북녘을 바라봐도/
아아라이 가물거리는 우내뿐/
내 발은 한 발작 땅뜀도 못한다//
이제 이 땅 에 묻히기를 작정한 지금/
어머니의 음성은 더 가까이/
내 머리 위에서 맥놀이로 번져 울린다/
가 노야/
가노야아 <어머니의 음성>(정관호)
▲정관호 선생님과 오랜만에 만나는 장기수 선생님들이 안 부를 나누고 있다.
▲정관호 선생님을 찾아 간 양심수후원회 김혜순회장과 양 원진, 강 담선생님
정관호 선생님 댁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인천의 박종린 선생 댁에 도착하니 해 잘 드는 곳에 나와 몇 시간을 기다렸다는 선생님이 밝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중국에서 조카 내외가 와서 돌봐드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희망이 생겨선지 건강도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였다. 남북경기에 관해 해설사 수준의 해박함을 자랑하는 선생님의 남북체육교류사와 함께 송환에 관련된 얘기들을 주로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박 선생님은 “57년 결혼하고 딸이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돼서 59년에 내가 나왔다”며 60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현지’에서 직접 지켜보고 올라가려다 사고가 나 체포됐다는 것이다. 무려 34년의 기나긴 감옥생활은 1993년 병보석으로 출소해 마감됐지만 피붙이 하나 없는 무연고의 남녘땅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2007년 6.15공동행사 남측 대표단으로 평양을 찾아 딸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박계동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문제로 분위기가 안 좋다고 해, 책잡히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겠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
북측에서도 이산의 아픔을 안타깝게 여겼는지 선생도 모르게 회의장 복도에 딸 가족들을 데려왔고, 계속 창밖에서 지켜보더라는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머리에 잡히는 게 있어 복도로 뛰어나가 봤지만 딸 가족들은 이미 자리를 떴고 북측 안내원은 “사전에 이야기하면 혹시 회의 도중이라도 나간다든가 하면 혼란이 야기될까 말 안 해 미안하게 됐다”며 딸 가족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 다시 한 번 딸 가족이 멀찍이 떨어져 승용차 안에서 선생을 배웅했고, 선생은 뛰어가다가 제지당해야 했다. “헤어질 적에는 100일도 안 됐던 딸앤데 50이 넘어 그렇게 한 번 봤어...”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을까, 선생님이 피곤해하신다. 식사를 하고 가라며 자리를 만드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서해의 석양을 두고 이별을 하면서, 딸하고 한번 만나서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선생님께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될까? 선생님은 “가장 급한 사람이 서옥렬 선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한 선생님의 심경은 오죽했을까? 정관호 선생님도 남북의 왕래가 자유로워져 동생들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그리움이 깊어가는 선생님들의 인도적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선생님이 하루 빨리 가족 품으로 가실 수 있게 더 바지런히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