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근 선생 추도사]
끝내 고향땅 밟지 못하고 가신 전쟁포로 이찬근 선생님
조선인민군 출신 전쟁포로 이찬근 선생님께서 국제법상 권리로서 마땅히 가야 할 조국에 가지 못한 채, 11월 17일 오전 11시 45분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찬근 선생님 장례는 을지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으며, 추도식은 통일애국지사 이찬근 선생 장례위원회 주최로 18일 저녁 9시에 발인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의 포로교환원칙에 따라 마땅히 조국으로 송환이 이루어졌어야 할 조선인민군 출신 이찬근 선생님께서 끝내 신념의 고향을 찾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2001년 2월 6일,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촉구 기자회견을 계기로, 특히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로서 조국과 고향으로의 송환을 요구해 오셨던 선생님이 오랜 옥고의 후유증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시고 평생 염원 보시지 못한 채 정든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30년 2월 11일,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용동에서 가난한 철도노동자의 3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억압과 착취,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대부분 민중들 삶이 그러했듯이 선생님 가정도 지독한 가난을 면치 못한 채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한 끝에 선생님 나이 다섯 살 나던 해, 중국 길림성 화룡현 화신촌 명산자 집단부락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그곳 국민우급학교를 다니셨고, 4학년 때 1944년 다시 흑룡강성 밀산 개척단의 농노로 강제 이주하셨다고 합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10월 개척단 농도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민 부락으로 옮기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46년 봄, 열일곱 나이로 당시 중국 모택동 군 소속인 자위군에 입대하셨습니다. 자위군은 동북민주연군을 거쳐 오늘의 중국 인민해방군 전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동북군구 후군부 제3지 대 포병으로 장개석 군과 맞서 크고 작은 전투를 하셨다고 회고하셨습니다. 그뒤 1949년, 선생님은 중국인민해방군 신분에서 방호산 사단장이 이끄는 조선인민군 6사단에 편재되어 고국으로 들어오셨고, 제3연대(661 군부대) 전사로 황해도 재령, 경기도 개성 송악산 등으로 옮기며 당시 남측 국방경비대와 잦은 전투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1950년 6·25 전쟁 시기 선생님께서는 6사단 소속으로 임진강을 건너 의정부 – 김포 – 수원 – 평택 – 군산 등 서해안 전선을 따라 남진했고, 전남 화순 – 광양 – 순천 – 하동 – 진주를 거쳐 함안에까지 진출, 부산을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8월 초, 함안 전투 현장에서 미군의 함포사격 파편으로 큰 부상을 당해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온 몸이 피투성이 상처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몸으로 부대를 찾아 헤매다가 미군과 한국군의 매복에 걸려 전쟁포로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해 8월 중순경, 마산육군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다시 부산 서면 포로수용소를 거쳐 1951년 2월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포로로 잡혀 있지만은 않으셨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함께 싸웠던 라태호 동지와 함께 삼엄한 포로수용소를 탈출, 조각배를 구해 경남 김해 해안에 상륙하는, 참으로 전설적 전쟁영웅의 장본인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북두칠성을 보며 어두운 밤을 이용, 북으로 북으로 걷다가 마침내 함안 땅 남강에 도착했고, 다시 의령군당 빨치산 부대와 극적인 조우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남 경우 도당위원장, 주병희 구역당 지도원, 박항규 의령군당위원장, 박창섭 의령군당선전부장 등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1951년 12월, 토벌대의 대공세 때, 의령군 자굴산에서 전투 중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다시 체포되셨습니다. 의령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진주형무소로 이감되어, 6·25 전쟁 이후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제정 공포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특별조치령) 위반으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뒤에 이 특별조치령의 잔혹성이 문제가 되어 1951년 1월 개정을 하게 되었고, 선생님은 대구고등법원으로 이첩, 1954년 7월 27일 정식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으셨습니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 이후 15년으로 감형, 1967년 7월 27일 40세 나이로 만기출소하셨습니다.
출소 이후 선생님께서는 대전 지역에 사시면서 공안당국의 부당한 감시와 통제에서도 온갖 궂은 일을 열심히 하시면서 처음으로 좋으신 분 만나 가정을 이루시고 안정된 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숨죽여 살아오시던 선생님께 새로운 희망을 드렸습니다.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의 1차 송환 이후 2001년 2월 6일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고, 앞에서 밝혔듯이 선생님께서는 대전 지역의 허찬영 선생님, 음성의 김동섭 선생님, 서울의 류기진 선생님 등 인민군 출신 전쟁포로임을 주장하시며 제네바 협정 정신에 따라 조국으로의 송환을 촉구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헤 정부 들어 반북대결정책으로 신념의 고향으로의 송환은 꽉 막혀버렸고, 특히 박근혜 정부는 오늘 국기문란 국정농단의 몸통으로 100만 촛불 국민의 퇴진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선생님께서는 1992년 중국 흑룡강성을 방문, 부모님과 두 분 형님 그리고 큰 누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채 작은 누님만 만나보실 수 있었으며, 둘째 형수님과 조카들만이 고국에서 살아계심을 확인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한 생을 일제식민지배 시대와 조국광복, 그리고 분단시대 동족상잔을 직접 겪으셨으며 조국해방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8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이렇게 험난한 삶 속에서 평생염원이었던 통일조국을 보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더욱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선생님, 영혼이나마 조국과 고향에 가시어 가족들을 만나시고 한을 푸시기 빌겠습니다. 고이 잠드소서.
2016년 11월 18일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드림
(후원회소식 301호)